헛..
17. Encounter
맞닥뜨린다. 그리고 우연히 마주한다. 세상에는 여자가 많고, 운명은 있고, 운명과 함께 할 인연이 있다. 없더라도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난 있다고 생각한다. 나비효과라고 하면 되려나, 무심코 아니면 어쩌다 내가 했던 행동들은 내게 그것들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한동안 외모가 잘나야만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건가라고 고민했던 시기가 있다. (물론 가끔식은 지금도 생각한다. ) 그렇지만 이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들이 몇 있다. 누가 봐도 외모가 잘생긴 남자인 친구에게 직접 들은 거니 믿을만하다. 그가 말하길, 분명 세상 모든 여자가 좋은 여자가 아닐 텐데 내게 다가오는 여자들은 다 성격이 좋아서 이상해. 맞는 말이다. 그것은 내게는 보이고 네게 보이지 않는 너와 나의 차이중 하나다.
그의 모친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를 어린 그에게 학대를 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쉽게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했고, 여자에 대해 물어볼 때 나에게 물어보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철없을 시절에는 외모가 뛰어나서 모든 것을 빨리 경험했다고는 했지만 연애를 마무리할 시기가 다가오니 혼란스럽다고 고백했다. 이런저런 의미로 외모는 상당히 스트레스 받을 수 있기에 외모가 잘난 것은 단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외모에 이끌리는 것과 우연히 단 둘만이 같은 공간에 있어서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난 우연의 경우를 비교해보자면, 후자 쪽이 더 재밌고 뭔가 더 깊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맞닥뜨린다. 처음엔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맞닥뜨렸고, 두 번째는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식사를 했고 근황을 나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과 커피와 그날의 추억은 외모와 상관없이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다.
내 방향으로 한 손을 내밀고 엎드려 있는 그녀가 말한다. 타임스퀘어에서 봤을 때 왜 번호 안 물어봤어? 네가 날 좋아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랬어. 매일 조금씩 너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또 너를 만날 수 있었어.
18. 기사와 파이터.
무패행진의 절대 무술강자, 중국 소림사의 왕진하우에 1024대 제자 이치코인과 유럽 잔다르크 호위대 수석 에펜베르크의 제자54기 졸업생 뤼옹프레셔의 싸움이 결정됐다. 무대는 역시 로즈엔젤레스가 좋겠다. 좋다 판은 깔렸다.
모든 티비중계와 그날의 뉴스를 도배하는 사건이다. 반복하는 취재진들의 침이 사방에 튀겨지고, 열정의 팬들의 땀은 그것과 만나 안개를 이룬다. 그 정도로 과열됐다. 둘 다 세계최고라는 타이틀을 이미 갖고 있고, 다른 종목끼리의 만남이라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룰 또한 정하는데 2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이건 이제 그 둘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문제고 이미 엄청난 액수가 움직인 상태다. 그 둘의 계기는 너무나 단순했다. 소림사의 제자는 패배하여 최고라는 타이틀에서 내려가기 위해서. 기사는 부추기는 주변인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이상하다. 한 명은 패배를 위해서고 한명은 이기기 위해서라니.
기사는 창을 제외한 방패와 갑옷을 쓸 수 있다. 소림사 제자는 이날만큼은 여태껏 수련해온 ‘기’를 쓸 수 있게 허용했다. 모를까봐 알려주자면, 소림사에서의 ‘기’라는 것은 주먹으로 강철조차도 격파할 수 있을만한 자연에너지를 몸에 두르는 것이다. 무술가 끼리는 그게 보이는 지 기사는 소림사 제자로부터 한 대 한 대를 맞을 때마다 데미지가 축적됨을 느꼈다. 1라운드에는 서로 별 문제가 없었다. 2라운드 또한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티비에서는 엄청난 싸움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들끼리는 자기들도 뭐하나 싶었다. 한명은 죽어라 때리고 한명은 무거운 움직임이 눈에 훤히 보였다. 문제는 3라운드였다. 드디어 소림사 제자의 기가 통했는지 기사의 방패에 일격을 가했을 때 ‘쿵’하고 소리가 났다. 몇 초 뒤 티비 중계진들 또한 역시 동양의 기는 무시 못 할 수준이군요, 저기 보십쇼! 방패의 철이 살짝 눌리지 않았습니까. 대단합니다. 단순한 인간이 맨주먹으로... 소림사제자의 기는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3라운드에는 무술가의 기로 기사를 눌러버렸다. 그렇게 3라운드가 끝나고 4라운드가 시작하나 싶었지만, 긴급히 투입된 응급팀들과 무술가팀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 더 이상 경기를 진행시킬 수 없습니다, 빨리 백기를 들어주세요 ”. 응급팀이 말했다. 싸우는 당사자는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 안되요, 이것은 무술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당신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치코인의 기를요! ”. 사부가 말한다. 이미 이치코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먹은 박살났고 자신도 충분히 이 놀이에 부응했다고. 그는 빨리 패배하고 조국으로 돌아가 중국에서 가장 큰 빌딩을 사고 가장 큰 마당과 수영장이 있는 집을 사서 편히 쉬고 싶었다.
그들의 고집으로 어찌저찌 4라운드는 시작됐고. 호기롭게 등장한 기사는 본격적인 주먹을 내놓는가 싶더니 퍽 하고 쓰러진다. 투구와 갑옷을 벗겼을 때 그는 이미 탈 수상태에 이르렀고 그로 인한 기절을 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안개가 경기장 안에는 크게 이뤄졌었는데 그 안개에는 기사의 땀과 침도 한몫했을 것이다.